
필라테스나 바레 스튜디오 원장의 하루는 수업이 끝난 뒤에야 시작된다. 오전 첫 수업을 열고 저녁 마지막 수업을 닫을 때까지, 원장은 강사이자 상담원이고 동시에 총무다. 문제는 그 뒤에 남는 일이다. 계약서 정리, 결제 내역 대조, 재등록 안내, 오래 나오지 않는 회원 연락, 환불 금액 계산, 강사 급여 정산. 매일 반복되지만 매일 손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다.
수업이 끝나면 장부가 시작된다
회원 100~150명 규모의 소규모 스튜디오에서 원장이 수업과 함께 떠안는 행정 업무는 생각보다 많다. 신규 회원이 계약서를 쓰면 회원권 종류와 횟수, 결제 금액, 등록일, 유효기간을 명부에 옮겨 적어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출석을 체크해 잔여 횟수를 차감해야 한다. 환불 요청이 들어오면 사용 회차를 세어 금액을 다시 계산하고, 월말에는 강사별 수업 수를 모아 정산서를 만든다.
이 업무가 원장의 저녁을 가져간다. 정작 매출을 만드는 일은 재등록 상담과 이탈 방지인데, 그 시간은 장부를 정리하다 사라진다. 원장이 직접 수업하는 매장일수록 행정을 나눠 맡길 사람이 없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문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입력’이었다
시장에는 이미 필라테스 회원관리 프로그램이 여러 개 나와 있다. 회원 명부 관리, 출석 체크, 결제 이력, 매출 통계까지 기능 목록만 보면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1인 원장 매장에서는 도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 프로그램은 ‘입력된 데이터’를 전제로 작동한다. 회원 정보를 직접 넣고, 결제 때마다 결제 내역을 입력하고, 수업이 끝나면 출석을 눌러 줘야 한다. 수업이 끝난 밤에 그 작업을 반복할 원장은 많지 않다. 데이터가 비면 잔여 횟수 알림도, 이탈 위험 분석도, 매출 통계도 함께 멈춘다. 기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입력을 감당할 사람이 없어서 실패하는 구조다.
계약서 한 장이 데이터가 되면
에이아이씨씨가 개발한 AI 매장관리 앱 ‘AICC’는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목표는 ‘입력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매장관리’다. 방식은 원장이 이미 하고 있는 행동에서 시작한다. 회원이 계약서를 쓰면 원장은 휴대폰으로 그 종이를 찍는다. AICC는 사진에서 회원 이름과 연락처, 회원권 종류, 결제 금액, 등록일, 잔여 횟수, 유효기간을 읽어 자동으로 등록한다. 영수증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된다. 별도 입력 화면을 열 필요가 없다.
데이터가 쌓이면 앱은 다음 일을 먼저 제안한다. 잔여 횟수가 얼마 남지 않은 회원, 일정 기간 수업에 나오지 않은 회원, 결제가 밀린 회원을 골라 ‘오늘 할 일’로 올려 준다. 재등록 안내나 안부 연락 문구는 AI가 초안을 만들어 두고, 원장은 보낼지 보류할지만 고른다. 환불 요청이 들어오면 사용 회차를 반영해 환불 금액을 계산하고, 월말에는 강사별 수업 수와 급여를 정산서로 정리한다.
기존 앱이 ‘기록’에서 멈췄다면 AICC는 ‘다음 행동’까지 이어 붙인 셈이다. 원장이 앱을 열어 무언가를 입력하는 시간이 아니라, 앱이 원장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시간이 길어진다.
캡슐바레 5개 매장, 본사 단위 계약이 변수
이 기능이 실제 매장에서 통하는지 확인하는 무대가 캡슐바레다. 더캡슐바디가 운영하는 바레·필라테스 스튜디오 브랜드로, 이번 실증에는 청담·금호·번동·마포·신정 5개 매장이 참여한다. 실증의 핵심은 실제 회원 계약서와 정산 데이터다. 데모용 샘플이 아니라 현장에서 쓰인 서류를 그대로 투입해 인식 정확도와 정산 결과를 확인한다.
협약이 개별 지점이 아닌 본사 단위로 체결됐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더캡슐바디가 새로 여는 매장에도 같은 방식이 적용되기 때문에, AICC는 단일 매장의 편의 기능이 아니라 다점포 브랜드의 표준 운영 도구로 검증받게 된다. 여러 매장을 운영할수록 회원 계약과 강사 정산을 매장마다 대조해야 하는 본사의 부담도 함께 줄어든다.
에이아이씨씨는 4분기 실운영과 베타 매장 모집을 거쳐 2027년 1분기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번 실증에서 확보한 데이터는 계약서 인식 정확도와 정산 자동화 기능을 다듬는 데 쓰인다.
차별점은 ‘자동 입력’과 ‘다음 할 일’
AICC가 내세우는 차별점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입력의 주체를 사람에서 AI로 옮겼다. 둘째, 관리 화면이 아니라 오늘 처리할 일을 전면에 놓았다. 셋째, 회원관리에서 끝내지 않고 환불 계산과 강사 정산까지 한 흐름으로 묶었다.
세 번째가 특히 실무적이다. 소규모 매장에서 정산은 매달 반복되는 대표적인 골칫거리다. 강사별 수업 수를 세고, 급여 항목을 맞추고, 본사와 지점이 같은 숫자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계산이 회원 데이터와 연결되면 정산서 작성에 쓰는 시간이 줄고, 매장별로 숫자가 어긋나는 일도 줄어든다.
운동 스튜디오에서 뷰티·네일로
에이아이씨씨가 다음으로 겨냥하는 곳은 뷰티샵과 네일샵이다. 회원권을 끊고 횟수나 기간으로 이용하며, 예약과 노쇼, 담당자별 정산이 반복되는 구조가 운동 스튜디오와 닮았다. 뷰티샵 고객관리나 네일샵 고객관리에서 되풀이되는 업무를 업종별 템플릿으로 만들어 같은 앱에서 쓰게 한다는 구상이다.
시장 크기만 보면 확장은 자연스럽다. 문제는 업종마다 다른 서류와 정산 관행이다. 운동 스튜디오의 회원권 계약서와 뷰티샵의 시술권·포인트 적립 방식은 다르다. 결국 AICC의 확장 속도는 업종별 템플릿을 얼마나 빠르게 쌓느냐에 달려 있다.
남은 과제는 인식 정확도와 현장 적응
가장 큰 변수는 계약서 인식이다. 매장마다 양식이 다르고, 손글씨로 고친 부분이나 도장, 할인 메모가 섞인다. 인식이 한 번 틀리면 원장은 다시 손으로 확인해야 하고, 그 순간 ‘입력을 줄여 준다’는 약속은 깨진다. 실제 계약서로 실증을 설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약서에는 이름과 연락처, 결제 정보 같은 민감 정보가 담긴다. 촬영한 문서를 어떻게 보관하고 누가 열람할 수 있는지는 도입을 결정하는 매장이 반드시 확인할 항목이다.
현장 적응도 숙제다. 앱이 보내는 알림이 잦으면 원장은 알림을 끄게 되고, 그러면 ‘앱이 먼저 챙긴다’는 구조 전체가 흔들린다. 결국 승부는 기능 수가 아니라 원장이 앱을 얼마나 적게 열어도 되는지로 갈린다.
‘입력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매장’이 증명되면
1인 원장 매장은 국내 필라테스·요가·바레·PT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 매장들이 매달 프로그램 사용료를 내면서도 장부를 손으로 쓰는 이유는,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력할 시간이 없어서다. AICC가 캡슐바레 5개 매장에서 이 명제를 증명한다면, 경쟁의 기준은 기능 목록에서 ‘입력 없는 운영’으로 옮겨 가게 된다. 4분기 실운영이 첫 시험대다.

